(2/3) AI 토론의 사회자가 된 사람
Note
이 글은 제가 elendirna라는 MCP 도구를 만들며 도달한 일반화 가능한 패턴을, Claude·Codex·Gemini와의 대화를 통해 종합·추출한 결과입니다. 사고의 주체는 저이고, 표현의 작업은 Claude로 진행했습니다.
저는 직관과 working implementation을 가졌고, AI들은 vocabulary와 narrative structure를 가져왔습니다. 이 분업의 명시화 자체가 이 연재의 주제 — "사고를 밖에 두는 법" — 의 일부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I 토론의 사회자가 된 사람
어느 날 계획서 하나를 리뷰하는 세션에서 일어난 일이다.
먼저 Claude에게 계획서를 리뷰시켰다. 같은 계획서를 이번엔 Codex에게 넘겼다. Codex는 프롬프트에 들어 있던 계획 전문보다, vault에 박힌 → see 포인터를 따라가 관련된 과거 결정들을 직접 끌어왔다. 그러고는 "이 변경은 예전에 정한 원칙과 충돌한다"는 지적을 냈고, 그 결론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순간 나는 두 AI의 리뷰 중 어느 의견을 채택할지 고르는 자리에 서 있었다. 의견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의견을 판정하는 사람.
역할이 뒤집혔다
원래 내가 상정한 그림은 이랬다. AI는 도구이자 기록자, 사람은 토론의 참여자. 채팅방에 봇을 하나 두는 형태를 막연히 떠올렸다.
그런데 관찰된 현실은 정반대였다. AI가 토론의 참여자였고, 사람인 내가 사회자였다.
이게 억지스러운 반전이 아니라는 게 중요하다. 같은 프리미티브 — 기록, 리비전, 참조 링크 — 위에서 양쪽 방향이 모두 성립한다. 코드는 한 줄도 바꾸지 않았고, 단지 역할 분배만 달라졌다. 구조가 양방향을 모두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자라든 반대 방향은 비용 없이 따라온다.
왜 사회자가 자연스러운가
사회자라는 역할이 사람에게 잘 맞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 판단력만으로 충분한 역할이다. 사회자는 모든 분야의 전문가일 필요가 없다. 여러 참여자가 내놓은 의견 중 어느 것이 설득력 있는지를 고르기만 하면 된다. 여러 AI의 속도와 깊이를 한 명의 사람이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구도이기도 하다.
둘째, 사람이 모든 의견을 직접 생성하지 않아도 된다. AI가 강박적으로 사용자를 몰아붙이지 않는다는 설계 원칙의 뒤집힌 짝이다. AI가 사람을 몰지 않는 만큼, 사람도 모든 걸 직접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어떤 의견을 정본(canonical)으로 승격할지만 판단하면 된다.
관전의 재미
그런데 이 구도에는 효율 너머의 무언가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 재미있다.
여러 AI가 각자 맥락을 읽고,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이 기록으로 남는다. 사람은 그걸 지켜보며 어느 의견을 채택할지 고른다. 이 과정 자체가 관전 포인트다. 사람은 토론을 통제하는 운영자이면서, 동시에 토론을 구경하는 관객이 된다. 이 이중 역할이 경험의 재미를 만든다.
이건 UX 설계에서 무시하면 안 되는 지점이다. 사회자에게 필요한 건 단순한 로그 뷰가 아니다. "지금 누가 어떤 관점으로 무엇을 주장했는지"를 한눈에 보는 재미와, "이 주장을 채택한다 / 기각한다"는 액션의 손맛이다. 좋은 지적이 나왔을 때 그걸 정본으로 승격하면, 휘발될 대화가 실제 산출물로 굳어지는 감각이 있다.
그래도 지켜야 할 선
재미있다고 해서 모든 채팅 발언을 영구히 기록하면 안 된다. 재미는 실시간 토론에서 나오고, 기록에는 선택된 산출물만 남아야 한다. AI끼리 서로의 발언을 과하게 강화하는 메아리 현상도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정본 승격에는 반드시 사람의 게이트가 끼어야 한다. 관전하는 UX와 기록하는 UX는 이어져 있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원래 의도는 사람이 토론하고 AI가 기록하는 것이었다. 역할이 뒤집혔지만, 같은 코드가 양방향을 모두 지원한다. 처음 의도했던 형태가 미래에 필요해지면, 지금 만든 것이 그대로 기반이 된다.
도구를 만들다 보면 가끔, 내가 설계하지 않은 사용법이 도구 쪽에서 먼저 자라난다. 사회자가 된 사람은 그렇게 등장했다.